[2018년 연례 학술회의] "북·미, 디테일에 숨은 악마를 만났다…천천히 서두를 때"
본문
한반도평화만들기 첫 연례 학술회의에 쏟아진 제언들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북한식 개혁개방은 어떻게 진행돼야 할까. 평화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해법과 조건은 뭘까. 2018년 7월 현재 격랑의 한반도를 둘러싼 핵심 쟁점들이다. 이에 대한 밀도 있고 구체적인 논의의 장을 13일 (재)한반도평화만들기(이사장 홍석현)이 마련했다. 지난해 재단 출범 후 첫 연례 학술회의다. ‘한반도 패러다임 대전환: 통일에서 평화로’라는 주제로 이날 서울 중구 월드컬처오픈에서 정치ㆍ안보ㆍ경제 분야를 아우르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다.
13일 오전 서울 중구 월드컬처오픈에서 열린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2018년 연례학술회의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왼쪽)와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재단 이사장이 자리에 앉아 대화하고 있다. 김경빈기자
정부도 귀를 기울였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축사를 통해 “혜안을 제시해주시길 바란다”며 “정부는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오찬 사에서 “아직도 살얼음을 걷고 있다는 게 현실적 평가”라며 “재단의 이름처럼 한반도의 평화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13일 오전 서울 중구 순화동 월드컬처오픈에서 열린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2018 연례학술회의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있다. 김경빈기자
‘한반도 비핵 평화와 동북아 국제정치’를 주제로 진행된 이 날 제1회의에선 북한의 비핵화 전망과 방법론, 이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역학 관계에 대한 열띤 토론이 오갔다. 발제자로 나선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는 자력으로 핵을 개발한 뒤 비밀리에 폐기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스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북한이 (풍계리) 핵시설을 폐기하는 등 자신들의 핵시설을 먼저 파괴하고 있는 건 사후 비핵화 검증의 근거를 훼손할 수 있는 나쁜 조짐”이라며 “비핵화 검증 모델을 빨리 개발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 한ㆍ미ㆍ중, 또는 한국이 주도하는 북ㆍ미ㆍ중 정책협의체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동북아 안보 질서가 급변하면서 북한이 생존 전략 차원에서 핵 개발에 나섰고 이로 인해 긴장이 고조됐다”며 “지금은 중국과 미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분담하는 정책협의체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이어 현 상황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빗대어 설명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의 급부상에 압박을 느낀 스파르타의 두려움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의 주장에서 나온 용어다. 박 교수는 “비핵화와 평화를 모두 이뤄내야 하는 우리로서는 미ㆍ중 모두와 관계를 잘 꾸려가면서 국제 분업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갑자기 비핵화에 나선 의도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신각수 전 주일 한국대사 겸 외교부 제1차관은 “북한이 핵으로 생존하려다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비핵화의 길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객관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북핵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대북 제재가 강해지면서 북한이 ‘성공의 저주’에 걸렸기 때문에 비핵화에 나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무기는 포기하더라도 핵 능력은 이미 보유했다는 계산으로 비핵화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협상 전망에 대해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합의는 북ㆍ미 정상 간에 한다고 해도 의회가 비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황지환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현재 상황이 비관적이지는 않지만, 낙관만 할 수도 없는 국면”이라고 말했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 오전 회담장인 카펠라 호텔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위해
만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 제공]
북한 개혁개방 전망에 대해선 다채로운 아이디어들이 제시됐다. ‘비핵화 이후 북한 경제의 현대화’를 주제로 진행된 제2회의에서다. 화두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이었다. 김 위원장 본인도 지난 4ㆍ27 남북정상회담 중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에서 “베트남식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지난 9일 베트남을 방문해 “베트남이 지나온 길을 북한이 따른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학술회의에서 전문가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장형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베트남식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doi moi)’가 베트남을 성장시켰다고들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며 “도이모이에 대해 베트남 내부에선 반발이 심했고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지적했다.
정태용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도 “베트남 개혁개방에 중요했던 것은 국제사회의 공조”라고 강조했다. 세계은행(WB),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등 경제 분야 국제기구와의 협력이 베트남 개혁개방의 첫걸음이었다는 의미다. 한양대 장 교수는 “지금 해야 할 일은 북한이 IMF나 IBRD에 가입을 공식적으로 신청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후 가입까지 최소 5년의 과도기가 지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정승호 북한경제연구실 부연구위원은 “북한의 경우 비핵화 등 전제조건이 더 까다롭고 전방위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만큼 개혁개방의 속도는 더욱 느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13일 오전 서울 중구 월드컬처오픈에서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2018년 연례학술회의가 열렸다.
최근 부상한 북한판 마셜 플랜 논의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했다. 마셜 플랜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 국가들에 120억 달러를 경제 부흥지원금으로 원조했던 것을 가리킨다. 전문가들은 북한과 같은 폐쇄사회에 갑자기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다면 오히려 자산 가격 급등락 등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양대 장 교수는 “북한엔 현재 막대한 자금을 수용할 수 있는 물적 역량이 미흡하다”며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인력 개발 지원”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한 한국 정부의 역할도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장 교수는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는 데 국제사회가 아무런 경제 지원도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시점에선 한국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며 “‘북한기술지원신탁기금’등을 조성하고 국제기구에 이 기금의 집행을 위탁하는 프로젝트를 정부가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북한 관료와 학생을 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하면서 개혁개방을 위한 준비를 돕자는 것이다.
북한의 시장화를 정부가 정책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서울대 김병연 경제학과 교수는 “북한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해 안으로부터의 시장화를 추동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 북한 가계 소득의 70% 이상이 시장에서 벌어들인다는 통계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학술회의 제3회의를 앞두고 참석자들에겐 ‘한반도 평화협정 전문’이라는 문서가 배포됐다. 모두 13장 49조로 구성된 A4 9장짜리 문서였다. 물론 실제 평화협정이 아닌, 발제자인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가 만든 예상 안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패러다임’을 주제로 진행된 제3회의에 박 교수는 남북과 미ㆍ중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협정안을 구상해 내놓았다. 전문(前文)엔 “이 협정은 향후 평화통일이 달성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유효하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그러나 박 교수를 포함한 참석자들은 평화협정까지의 길은 지난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박영호 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핵 문제를 둘러싼 오랜 협상 경험은 앞으로 북한 문제를 푸는 것도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을 말해준다”고 말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본격적인 비핵화 논의 착수 시점부터 평화협정이 논의돼야 하며, 남북 사이에서 먼저 (9월로 예정된) 정상회담 이전에 이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회의의 주제인 ’한반도 패러다임 대전환: 통일에서 평화로’를 두고도 열띤 토론이 오갔다. 김준형 한동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는 “통일 담론은 (흡수통일이 연상되기 때문에) 북한에 위협이 된다”며 “통일보다 평화가 우선이라는 평화 담론으로 전환한다면 남북을 포함한 미ㆍ중 모두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또 “강자인 미국이 양보하지 않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며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도 수용하지 못하는 미국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조 위원은 이어 “미국 입장에선 종전선언을 하면 유엔사 해체 등 껄끄러운 이슈가 대두한다”며 “미국의 이런 우려를 불식하면서 평화협정 전까지는 군사정전협정이 유효하다는 내용을 종전선언에 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자유 토론으로 진행된 마지막 제4회의에선 다양한 제언이 쏟아졌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국제문제대기자는 북ㆍ미 정상회담 후 후속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데 대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바로 우리가 그 악마를 만난 상황”이라고 풀이했다. 김 전 대기자는 “폼페이오 장관의 최근 방북이 실패였다고 비판하는 건 맞지 않는다”며 “비핵화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다 알고 있다. 인내심을 갖고 ‘페스티나 렌테(천천히 서둘러라)’는 말을 되새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트럼프 정부 비판에 제동을 걸었다. 이 전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을 조롱하는 많은 이들은 김 위원장이 대북 제재에 못 이겨서 협상에 나왔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을 포기하는 대신에 체제 안전보장과 경제 제재 해제가 이뤄지면 중국과 베트남보다 더 고도성장하는 북한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지적했다. 이 전 장관은 이어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진정성을 믿은 것이고 나도 트럼프 대통령이 맞다고 본다”며 “현재 북ㆍ미간 엇박자는 구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행을 만들기전까지 삐걱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중국 전문가인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은 지금 북한이 전략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며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김 위원장을 만나 ‘국제정세와 지역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중국 정부와 당의 북한에 대한 지지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평가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