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오디세이 2016] 하산에 제2 개성공단을…한민족의 유라시아 진출 베이스캠프 세우자
본문
반도(半島)의 생명력은 대륙과 해양의 접점에서 비롯된다. 대륙과 해양으로 맘껏 뻗어나갈 수 있을 때만이 반도는 활기를 얻을 수 있다.
푸틴, 신동방정책에 11조원 투입
경제수도로 블라디보스토크 육성
전력·용수 풍부한 하산의 자루비노
러시아선 중국인이 진출할까 우려
한국에 투자해달라 적극 러브콜
한국 기술, 러시아 땅, 북한 인력
개성공단처럼 폐쇄 가능성 작아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위기다. 폐쇄적인 북한에 가로막혀 외딴섬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같은 강대국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대륙과 해양을 잇는 접점이 돼야 한다.
‘평화 오디세이 2016’ 참가자들은 모스크바행 시베리아횡단열차(TSR)가 출발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그것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표지석의 숫자는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의 총연장 길이 9288㎞를 의미한다.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은 “한반도의 반도성을 회복하는 그날까지 오디세이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일 연해주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블라디보스토크 독수리전망대. 황금뿔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금각만(金角灣)에는 러시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과 상선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부동항을 러시아가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가 절로 설명되는 풍경이었다.
평화 오디세이 2016 참석자들 입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10년 전에 와 봤는데 도시가 완전히 달라졌네!”(정의화 전 국회의장), “항구가 북적대는 게 멋지구먼.”(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인구가 적어 한적할 것만 같았던 블라디보스토크는 활기찬 극동의 관문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금각만 위로는 개통된 지 4년 된 블라디보스토크대교(금각만대교)가 도시의 경관을 한층 역동적으로 연출했다. 이날 저녁 오디세이 일행은 이 다리를 건너 마린스키 극장을 찾았다. 마린스키는 볼쇼이와 함께 러시아의 양대 발레단으로 지난해 극동에 분관을 냈다. 안으로 들어가자 한국·일본·중국에서 온 관람객이 북적댔다. 김종민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이사장은 “예전 같으면 극동에서 발레를 관람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불모의 땅으로만 알려진 연해주의 이런 변화는 모두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에서 나오고 있다. 세계 1위 영토를 갖고 있는 러시아는 극동에서 인구가 줄고 경제 활력이 떨어지자 위기의식을 느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런 우려를 해소하려고 2000년대 들어 극동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푸틴이 2012년 9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치하고, 2013년 러시아 연방정부에 극동개발부를 신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러시아는 APEC을 계기로 이 지역에 총 6793억 루블(약 11조8000억원)을 투자해 교통과 도시환경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고 현대화했다.
러시아는 앞으로 극동을 국가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앞세우려고 한다. 모스크바를 정치·군사·외교 중심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문화·사법 중심지로 키우고 블라디보스토크를 태평양의 경제 수도로 건설한다는 복안이다. 그 가능성은 오디세이 2일 차 일정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오디세이 일행이 버스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1981년 개항한 자루비노 항구. 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유라시아·북한인프라연구소장이 마이크를 잡고 한국에 자루비노항이 갖는 전략적 가치를 설명했다. “자루비노는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갈 수 있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접점”이라는 얘기다. 자루비노는 2013년 러시아의 접경지역인 북한 나진과 철도가 연결된 러시아 하산에 속하는 지역이다.
북한을 열고 들어가는 관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참가자들은 자연스럽게 ‘제2 개성공단’의 가능성을 거론했다. 자루비노는 개성공단보다 월등한 산업환경을 갖추고 있다. “전력과 용수가 풍부하고 배후지의 부지 조성도 다 돼 있다. 무엇보다 여기선 현지 러시아인과 국경에 인접한 중국인, 고려인(카레이스키) 노동력에 더해 북한 노동자도 이용할 수 있다.”(안병민 소장) 그렇게 되면 국제 공단화함으로써 북한의 자의적 폐쇄 등 위험이 크게 줄 수 있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과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최태원 SK 회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참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성공단은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따라 2월 10일 전면 폐쇄됐다. 남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막힌 셈이다.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신각수 전 주일대사 같은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남북대화의 재개가 필요하다면서도 현재의 경색 국면에서는 마땅한 돌파구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연해주에 ‘제2 개성공단’을 건설하자는 구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러 양국 정부는 2008년부터 10조원을 투자해 자루비노 항구와 배후물류단지를 개발하자는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극동 러시아에 한국 기업을 위한 항만·물류단지 개발을 푸틴에게 제안했다. 제안 내용은 자루비노항의 선석을 기존 4개에서 15개로 대폭 확대하고 5000만 평 규모의 배후단지를 조성하는 방안이었다. 러시아는 처음엔 소극적이었나 인구 과소 지역인 연해주를 개발한다는 푸틴의 신동방정책과 부합한다고 보고 양국 간 협력에 합의했다. 이후에도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계속 협의되면서 한·러 양국은 철도·공항·도로·항만 등 교통·물류 전 분야에 걸쳐 협력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사업계획이 구체화되면서 2011년 9월 자루비노 항만 현대화 사업에 착공해 2012년 항만 현대화 부분 개장에 이어 2013년 사업을 완공한다는 로드맵이 확정돼 있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초기에는 분위기가 좋았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신북방정책이란 연해주 개발 참여 프로젝트의 명칭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러시아로선 한국만 한 파트너가 없었다. 중국은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에 걸쳐 1억10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극동 인구가 200만 명에 불과한 러시아로선 중국인의 진출이 너무 활발하면 연해주가 실질적으로 중국인 손에 넘어갈 것이란 ‘차이나 포비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일본과는 쿠릴열도 문제로 부담스러운 관계다.
결국 연해주 산업공단 아이디어는 한·러 양국의 경제와 안보에 모두 도움이 되는 윈-윈의 기회였다. 게다가 연해주는 반도체를 비롯한 전략물자 반입이 가능해 북한 개성공단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다양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5년간 세금이 면제되고 세무조사도 극동개발부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등 외국인 투자에 대한 지원이 강력하다.
하지만 2013년 이후 북한의 핵 개발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서방의 러시아 제재가 본격화하면서 이 구상은 급격히 탄력을 잃게 됐다. 국내 기업들도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까지는 연해주 산업공단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연해주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이제 상황이 다시 바뀌고 있다.
오디세이 참석자들은 “기술과 자본은 한국이 제공하고 러시아가 운영자가 되면, 북한 근로자가 자연스럽게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해주에는 벌목공과 건설 노동자를 비롯해 북한 근로자 1만~2만 명이 외화벌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하려면 연해주 지역 거주자에 대한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태원 회장은 “협력이 잘되려면 서로 이웃이라는 신뢰부터 쌓을 필요가 있다. 오디세이가 그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해주는 러시아의 극동 개발이 진척될수록 동북아의 교통·물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기금 교수는 “온난화의 여파로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동해가 극동의 지중해로 떠오르면서 이 지역의 개발이 더욱 탄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단독] 하산에 제2 개성공단을…한민족의 유라시아 진출 베이스캠프 세우자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