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비전 포럼] 일본발 금융위기 가능성 크지 않지만 안심도 금물이다
본문
외환위기 때도 일본이 방아쇠 당겨
경제지표 계속 악화하고 있어 불안
뻔히 알고 당하는 ‘회색코뿔소’ 주의
한·일 관계 복원이 불안해소 지름길
악화 일로로 치닫는 한·일 관계의 출구를 모색하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찾는 ‘한일 비전 포럼’ 12차 모임이 26일 열렸다.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으로 양국 관계가 더욱 냉각된 가운데 열린 이 날 모임에선 양국 간 충돌이 자칫 금융 분야로 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다. 발제자로 나선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전 한국금융연구원장)는 ‘일본발 경제 쇼크와 금융위기’를 주제로 글로벌 금융망 속에서 일본이 어떤 카드를 내밀 수 있는지 긴급 진단했다. 이어진 토론에선 “금융의 특수성 때문에 일본의 불안이 우리 금융을 위협하는 방아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경계론과 “한국의 경제 체력이 과거와 달라 과도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다소 긍정적인 전망이 엇갈렸다.
해외 자본은 국내에 들어올 때는 계단을 올라가듯 천천히 유입되지만, 국내 상황이 안 좋다고 판단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듯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소위 ‘서든 스톱(sudden stop)’으로 불리는 해외 자본의 급격한 유출이다. 외환 위기 때 이를 경험했던 우리로선 일본발(發) 리스크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외환위기 때도 일본 자본이 먼저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유럽 은행들이 뒤를 쫓는 형국이 벌어졌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상호의존성의 무기화(weaponization ofinterdependence)’ 관점이 언급되기도 한다. 서로 의존하게 한 다음에 뒤통수를 친다는 의미다. 금융에서도 이를 경계해야 한다.
대외 자산과 부채를 비교한 국제 투자 대조표를 놓고 보면 우리 금융 구조에서 일본의 비중은 낮은 편이다. 또 일본 은행들이 우리 우량 기업에서 당장 돈을 회수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정부가 ‘일본발 리스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그러나 수출 감소 등 경제 상황이 악화하고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볼 때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만에 하나 지소미아 파기 등으로 인해 실제 일본계 자금이 이탈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면 제3자에게 영향을 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자기실현적 예상 또는 서든 스톱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강경 일변도의 대응은 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다.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외환위기 때와 달리 지금은 국내에 외화가 많다. 강남 부자들이 가진 외화나 달러만 해도 상당하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일본에 대한 순부채는 우리나라 전체 대외순자산의 10분의 1 정도다. 극단적 경우를 가정해 일본이 자금을 모두 회수해가도 우리 외환보유액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일본과 금융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번 사태가 일본을 극복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혁신성장·공정경제 정책 중 지금까지는 소득주도성장만 강조됐는데, 대일 종속을 극복하기 위한 부품·소재 국산화 이슈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혁신성장이 강조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부원장=일본 차입은 과거 은행 간 거래가 대부분이었으나, 최근 들어선 기업이 일본 은행에서 직접 빌리는 형태로 많이 바뀌었다. 이번 사태가 터지고 난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급히 방일해 일본 3대 금융그룹 회장을 만나고 온 것도 그런 차원으로 보인다. 해외 진출한 우리 대기업들이 일본 돈을 많이 쓰다 보니 앞으로 대출이 막힐까 봐 노심초사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 해도 한·일 금융 갈등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일본 자금의 유출이 트리거(trigger·방아쇠)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일본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낮다. 일본은 ‘엔화의 국제화’를 위해서도 우리와 금융 협력이 필요하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중소기업이 설비·장비 수입과 관련해 앞으로 금융 문제가 발생하면 수입이 원활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와 관련한 실태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기업이 일본 기계를 들여올 때 일본 금융기관의 리스를 통해서 수입하는 경우가 많다. 부품·소재뿐 아니라 이런 설비·장비도 중요하다. 한 개라도 문제가 생기면 공장이 멈춰 설 수 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투자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리스크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지소미아 종료가 해외 투자자들에게 주는 심적 효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광해=한·일 관계에서 금융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선 돈 빌리는 사람도 적고, 투자도 원활하지 않다. 우리 기업에서 돈을 빼고 대출을 안 해주면 오히려 일본 은행이 영업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신각수=상호 손실이지만 타격을 입히겠다는 의도가 있을 때는 차원이 달라진다. 지금 상황이 악화하고 위기로 가니 일본이 비정상적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수출규제 소재 3품목이나 화이트 리스트 배제 등 일본이 취한 조치를 보면 ‘스톡’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플로우’에 손을 대고 있다. 수도꼭지에 밸브를 만들어 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조이겠다는 것이 아니다. 금융 역시 스톡만 보면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심리 효과를 생각할 때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침 수출·소비·투자·고용 등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내려가고 있어 안심하기 힘들다.
▶윤창현=우리 산업 전반을 봤을 때 반도체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반도체 산업의 생리를 제일 잘 아는 것이 일본이다. 한번 올라갔다가 내려온 경험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어디서 수도꼭지를 잠그면 고통스러울지 잘 알고 있다. 금융도 실물 영향을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이 어느 날 갑자기 수도꼭지를 잠근다면 금융도 금세 흔들릴 수 있다. 이런 불안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선 대통령이든 누구든 나서서 국내 해외투자 기업들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서석숭 한일경제협회 부회장=한·일 양국 기업 모두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실질적 애로를 토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화제 중심에 서길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기업은 정부가 규제로 발목 잡지 않는 것을 선호할 뿐이지, 정부가 대단한 것을 해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기업 잘못이 아니라 외생변수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금융도 그럴 수 있다. 정부가 그런 내밀한 목소리를 경청하길 바란다.
▶김광두=국제 신용평가사들의 평가는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 우리가 IMF에 항복할 때까지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우리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오히려 전혀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믿을 것이 별로 못 된다. 국내에 들어온 일본 증권과 채권을 들여다보면 일본 정부가 관여하는 기금이 투자의 70%를 차지한다. 일본 정부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일본은 국제 금융시장의 최대 채권국이기도 하다. 일본 마크가 붙어 있지 않더라도 국내에 투자된 신디케이트론, 헤지펀드, 사모펀드 등에 일본과 연계된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오늘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다뤘다. 지소미아 문제로 인해 불확실성이 높아졌지만 모든 수단을 강구해 복원 노력을 해나가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정리=김상진 기자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