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비전포럼23] 미·중 기술패권에 대비해 한·일 ‘제3의 기술축’ 협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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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일관계 연속 진단 〈23〉
기술 패권을 둘러싸고 미·중 간 글로벌 경쟁 구도가 격화하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도 과거사 갈등을 극복하고 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28일 열린 제23차 한일비전 포럼에선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한·일 기술협력 방안에 대해 전문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참석자들은 “미·중 경쟁 구도에서 한·일이 기술 협력을 고리로 제3의 축을 만들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향후 관계 개선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일은 데이터 인프라 구축에서 협력할 수 있다. 인프라를 마련하는 과정에선 힘을 합치고, 이후 그 인프라를 각자의 비즈니스에 맞게 활용하며 경쟁을 벌일 수 있다. 인프라 활용 과정에서 블록체인과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 또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기존의 데이터 인프라에 반영할 수 있다. 이로써 끊임없이 인프라가 확장하고 발전하는 사이클을 만드는 게 4차 산업혁명과 소사이어티 5.0이 꿈꾸는 미래 세계다.
기술 경쟁은 스포츠 경기와 달리 한 번 이긴 사람이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꿀 수 있다. 후발주자는 영원히 선발주자를 따라갈 수 없는 무한경쟁이다. 개별 기술 확보에 집중하기보다는 기술 협력을 기반으로 큰 시너지 효과를 노려야 한다.
제조업 강국으로는 한국 이외에 미국·일본·독일·중국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이중 한·일이 기술협력을 통해 ‘제3의 축’을 형성할 수 있다. 협력을 모색할 수 있는 구체적 분야로는 ▶기술 로드맵 작성 ▶국제 표준화 활동 ▶발명 특허 등 지식재산권 ▶과학기술 인재교류 등이 있다. 또 한·일이 만든 ‘제3의 축’을 중심으로 여타 기술 강소국을 참여시키고 기술 공급원을 확보하며 시장을 확대하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미·중 경쟁의 핵심은 바로 기술과 군사다. 지난 2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반도체·배터리·희토류·의약품 등 4개 핵심 품목의 글로벌 공급망을 점검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지난 16일(현지시간)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5세대(5G)를 넘어 6G 이동 통신에 대한 투자를 논의했고,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협의했다. 쿼드(Quad·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 협의체)에서도 기술 협력을 무겁게 다루고 있다. 한·일 관계가 정상 궤도를 찾게 되면 기술협력은 양국 상생을 촉진하는 핵심 요소다.
▶이우광 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무엇보다 일본의 지도자와 기업 관계자들이 ‘왜 한국과 협력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감하도록 하는 게 과제다. 일본 정부가 일으킨 소재부품의 수출입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이 일본 의존을 탈피할지 혹은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표준화 분야 협력을 하려면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표준화 작업은 무엇인지, 한·일이 ‘제3의 축’으로서 어떤 방식의 표준화를 추구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과거 한·일 관계가 좋았을 때 양국은 서로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최근 관계가 냉각되면서 한·일 모두 상대방의 필요성을 반추할 수 있게 됐다. 어쩌면 이 냉각기는 서로의 중요성을 재인식할 좋은 기회다. 향후 코로나를 극복하고 한·일 관계가 개선된 뒤 기술협력과 4차 산업혁명은 좋은 테마가 될 것이다.
▶서석숭 한일경제협회 부회장=기업에 가장 중요한 건 일관성·투명성·예측가능성이다.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조치와 같은 갈등이 계속 이어진다면 기업은 생존을 위해서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디지털 정보뿐 아니라 아날로그로 체화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와 경험의 공유가 매우 중요하다.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고 기업의 데이터 기술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의 체계화만 추구할 경우 모래 위에 집을 짓듯이 기반부터 불안정해질 우려가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미·중 경쟁이 첨예화하는 지금, 한국이 굳이 한 쪽만 선택하고 다른 한쪽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까지 한국의 경로를 봤을 때 첨단기술 분야는 미국과 협력해 안보동맹·기술동맹을 구축하는 데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중국과의 기술협력 가능성을 지나친 수준으로 열어두면 불필요한 불신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일 간 기술협력은 상당히 리스크가 적은 편이다. 어느 국가와 협력해야 인류 생활과 자유의 수준 향상 등 인본주의적 가치를 높일 수 있을지도 고려해야 한다.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20세기가 이데올로기 투쟁의 시대라면 21세기는 테크놀로지 경쟁의 시대다. 한·일 기술협력은 미·중 간 신냉전 프레임을 피하면서 양국이 추진할 수 있는 적절한 구상이다. 다만 양국 관계를 고려할 때, 기술 협력의 주체는 결국 기업이 돼야 할 텐데 지난 4년간 한·일 갈등으로 인해 기업이 정부의 정책에 알아서 동조하는 이른바 ‘촌탁 혹은 손타쿠(忖度·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림)’ 현상이 지속했다. 따라서 한·일 간 기술협력을 위해선 정치·외교 영역의 정상화가 급선무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한·일 기술협력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한·일 관계가 크게 악화해 기술 협력을 모색할 만한 동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교착 상황을 애써 타개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셋째는 현 정부 임기가 약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3개월 전과 다른 판결을 내렸다. 주권 면제 원칙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변화를 선순환으로 활용해야 할 텐데 정책적 의지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한국이 IT·전자·반도체 분야에 우위를 갖고 있다면 일본은 전통적으로 자동차·화학 분야 강국이다. 한·일이 경쟁력을 보유한 영역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노리기보다는 각자의 기술을 그대로 독점하는 게 자국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은 없을지 의문이 든다. 또 2019년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이후 한·일 간 상호 신뢰가 현저히 저하돼서 기술협력에 차질을 빚었던 측면은 없는지, 최근 한·일 간 기술협력의 성공 및 실패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일본이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핵심 신기술에 대해서도 경쟁력을 가졌는지 따져봐야 한다. 디지털 분야에서 한·일 간 기술 수준의 격차는 없는지, 한·일 디지털 기술의 현주소는 무엇인지 검토해야 한다. 또한 미·중 전략경쟁 구도에서 한·일이 기술을 고리로 미·중에 대항하는 제3의 새로운 축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한·일이 주도하는 ‘제3의 축’은 당위성·필요성·가능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핵심 산업에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표준화를 주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 5G, 6G 표준화를 중국에 넘긴다면 어떻게 되겠나. 다만 한·일이 기술협력을 추진하려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일본 지도자들의 정치력이 과거보다 줄어들었고 한국에서는 반일 정서가 여전히 짙다. 한·일이 서로 갈등만 하다가 기술 분야에서 미·중 한쪽에 예속돼선 안 된다.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미·중 경쟁 국면에서도 중국·대만·홍콩은 중화경제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홍콩의 금융 허브 기능이 강화되고 있고, 대만의 총수출에서 중국 비중도 여전히 높다. 1965년 체제(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다양한 교류를 통해 공고하게 상호 이익을 지켜온 한·일이 지금 경제·기술적 측면에서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일본은 개인 프라이버시를 중시하고 정부 부문 전산화가 늦어져 디지털화가 뒤처져 보일 뿐이지, 기업의 디지털 기술은 앞서 있다. 도시바·SK의 반도체 협력, 네이버·야후 재팬의 라인처럼 협력 사례가 나오고 있다. 이 분야는 기득권이 아니기 때문에 협력이 가능하다.
정리=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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