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김정은도 한눈팔면 전쟁에서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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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선거 절박한 트럼프 상대로
CVID 안 주고 전투에서 이겼지만
미 의회·싱크탱크·언론 감당 못해
문재인·트럼프 선의 배신 말아야
이하경 주필
지금 청와대 핵심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이들은 사석에서 트럼프를 “일촉즉발의 한반도 전쟁 위기 상황에서 비핵화와 평화 국면으로 전환시킨 주역”이라고 평가한다. 트럼프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평화 프로세스가 치명상을 입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을 앞두고 폴라 화이트, 프랭클린 그레이엄 등 미국 목회자들에게 “북·미 회담이 잘될 것이니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운을 내라고 말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트럼프가 21시간의 장거리 비행 끝에 싱가포르에 도착할 때 지쳐 보이자 문재인 대통령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한반도 평화의 기회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트럼프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하다. 의회·싱크탱크·언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결과에 불만이다. 호언장담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의 근처에도 못 가고 김정은의 입지만 강화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구체적 시기와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채 “비핵화를 잘할 테니 믿어 달라”는 식의 막연한 약속만 했다. 이제 3주가 흘렀고, 한·미는 연합훈련을 중단했지만 북한의 비핵화 이행 초기 조치는 깜깜무소식이다. 천하의 미국이 북한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제재 분위기도 흐트러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에 대북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독자 제재를 1년간 연장한 미국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미 중국의 제재가 느슨해지면서 북·중 접경의 단둥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북한이 복수의 비밀장소에서 핵무기 연료 생산을 늘려 왔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6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성의 있는 비핵화 조치를 요구할 계획이지만 결과는 낙관하기 어렵다.
이하경칼럼
지금까지는 협상의 승자가 김정은이다. 별로 내주지 않고도 미국과 대등한 정상국가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거머쥐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의 절박함을 공략해 전투에서는 이긴 것이다. 북한이 시간을 끌면서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 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건 아니다. 진정성이 아닌 꼼수로 미국을 상대하면 관계 정상화도, 경제적 지원도 물거품이 된다. 북한을 꽁꽁 묶어 온 냉전·적대구조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미국은 대통령 혼자가 아니라 의회·싱크탱크·언론의 비판과 검증, 대안 제시를 통해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체다. 상호신뢰와 진정성이 없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희망적인 신호도 있다. 김정은은 세 차례 중국을 방문하는 동안 ‘중국의 실리콘 밸리’인 중관춘 과학기술단지와 농업과학원, 베이징시 궤도교통지휘센터를 찾았다. 3차 방중 때는 경제를 총괄하는 박봉주 내각총리와 교육·과학담당인 박태성 노동당 부위원장이 동행했다. 김정은의 경제 중시 의지가 확인된다.
비핵화를 하지 않고 중국·러시아의 손을 잡기보다는 핵을 내려 놓고 압도적 경제대국인 미국과 친구가 되는 것이 잘사는 길이다. 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도 수렁을 헤매다가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한 이후에야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개발자금이 들어오면서 성공 궤도에 올랐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4·27 남북 정상회담 하루 전날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된 ‘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의 말을 인용해 “현실의 외교 정치에서 중요한 방향 전환은 최소한 미국의 인내와 동의가 없이는 어렵다”고 했다. 북한이 새겨야 할 현실인식이다.
불같은 성격의 트럼프가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의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은 북한에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방북을 앞둔 폼페이오는 상원 청문회에서 “CVID를 약속하지 않으면 협상장을 떠날 것을 약속하느냐”는 질문에 “그럴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이후 줄기차게 미국 정상과의 만남을 소망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도왔고, 트럼프가 화끈하게 들어줘 소원을 성취했다. 그뿐인가. 비핵화에만 초점을 맞췄던 역대 미국 정권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는 관계 정상화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데도 김정은이 한눈팔면 남북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고립무원의 김정은이 문재인과 트럼프를 동시에 만난 것은 기적 같은 행운이다. 그렇다면 선의를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 완전한 비핵화 결단을 내려야 본인도 워싱턴에 가고, 트럼프도 평양에 날아오는 천지개벽의 상황이 온다. 신(神)은 분단과 전쟁·냉전으로 오래 고통받은 한반도에 어렵게 평화의 문을 살짝 열어주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들어가야 전쟁과 적대를 끝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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