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근의 한반도평화워치] 한국 원자력의 미래, ‘농축·재처리’ 제도 정비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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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원자력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원자력 후발국으로서 1978년에 첫 원전을 가동한 후 원전 26기를 운영하는 원자력 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동안 한국은 농축 핵연료를 전량 국제시장에서 구매하고, 사용후핵연료는 원전 부지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농축재처리 없는 원자력’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러 경쟁으로 핵연료 공급망이 불안정해지고, 탄소중립과 AI 시대에 탈탄소 에너지 수요가 폭증하면서 한국의 ‘농축재처리 없는 원자력’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 더욱이 차세대 원자로는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HALEU), 사고저항성 핵연료, 초우라늄 연료 등 신형 핵연료를 요구함에 따라, 농축재처리 역량이 없다면 미래 원자력 경쟁에 뒤처지게 된다.
농축·재처리는 발등의 불
한·미는 지난해 10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원자력협정과 미국 국내법의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이 1975년 농축재처리를 포기한 후 처음으로 ‘농축재처리 있는 원자력’으로 이행하기 위한 정치적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한·미 정상이 정치적 합의를 했다고 향후 농축재처리 도입 절차가 순탄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재 세계에는 14개의 농축기술 보유국과 10개의 재처리기술 보유국이 있다. 세계 5위의 원자력 대국인 한국도 농축재처리를 보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한국의 농축재처리 도입 시도는 미국의 강력한 핵비확산 정책과 갈등하게 된다. 미국은 1974년 인도의 평화적 핵실험을 계기로 농축재처리의 확산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개발 프로그램이 첫 번째 타깃이었다. 미국의 농축재처리 통제정책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1975년 이후 새로 농축재처리 역량을 획득한 나라는 파키스탄, 이란, 북한 등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는 3개국뿐이었다. 한국이 농축재처리를 하게 되면 1975년 이후 미국의 동맹·우호국 중에서 첫 번째 허용 사례가 된다. ‘농축·재처리 있는 원자력’으로 전환은 그만큼 어려운 정치외교적 과제다. 이를 위해 한국이 준비해야 할 3가지 국내 조치를 제안한다.
첫째,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기본법’(원자력 기본법)의 제정이 시급하다. 이 법의 목적은 국익, 국가발전, 에너지안보 관점에서 원자력의 가치와 임무, 역할을 정립하고, 이를 위한 범정부적 총괄조정체제를 수립하고, 관련 부처에 책무를 부여하는 데 있다. 현행 원자력 법제의 두 축은 원자력진흥법과 원자력안전법이다. 전자는 연구개발과 이용의 진흥에, 후자는 방사선 재해 방지와 안전규제에 집중한다. 그 결과, 원자력은 전략적·산업적·외교안보적 의미가 큰 분야이지만, 단지 위험하여 규제가 필요한 산업기술의 하나로 취급됐다.
현재처럼 원자력 연구개발, 산업, 수출, 에너지안보, 규제 기능이 분산되어, 국가적 임무가 불분명하고, 총괄조정 기능이 미비한 구조로는 ‘농축재처리 있는 원자력’으로 전환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법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핵비확산과 핵투명성 원칙, 에너지안보를 위한 임무, 세계평화와 국제적 기여 원칙을 천명토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 국무총리 소속 원자력진흥위원회를 명실상부한 최고위 원자력정책 총괄·조정기구로 정립하고, 위원회의 사무국 기능과 전문가 참여를 강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농축재처리 도입의 배경·목적·원칙·필요성·임무를 기술하여, 농축재처리 도입의 법적 근거와 명분을 제공해야 한다.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 넘어야
둘째, ‘비확산 기본법’ 제정이다. 미국이 한국의 농축재처리를 반대한 주된 이유가 ‘핵확산 위험성’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이 국민의 핵무장 지지도가 70%가 넘는 상황에서 과연 농축재처리 도입을 관철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과 조현 외교부 장관이 기자회견이나 기고문에서 한국 핵무장은 한국경제의 개방성과 한·미동맹 관계를 감안할 때, 비현실적이며 불가능한 옵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정치지도자와 고위 인사의 핵비확산 의지 표명은 핵비확산 신뢰성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국내의 높은 핵무장 여론과 빈번한 정치인의 핵무장 발언을 볼 때, 핵확산에 대한 외부의 의구심을 해소하기에는 미흡하다. 특히 한국의 농축재처리에 대한 미국의 “예외적인 동의”를 구하려고 한다면 ‘비확산 기본법’과 같이 제도화된 핵비확산 공약이 필요하다. ‘비확산 기본법’은 한국에 추가적인 비확산 의무를 부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한국이 이미 가입하고 이행 중인 수많은 핵비확산, 핵안보, 수출통제 관련 비확산 국제레짐을 체계적, 효과적으로 총괄하는 모법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범정부적 비확산정책과 실행계획을 총괄·조정하고, 핵전쟁·핵테러·핵확산의 위험성을 알리는 시민 교육도 필요하다.
셋째, 한·미 원자력 교류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한·미 원자력협력기금’ 설치도 고려해야 한다. 한국 원자력은 원천 기술 보유국인 미국과 협력하며 발전해 왔고, 한·미 원자력협정을 통해 지원과 통제를 동시에 받았다. 미국은 미래 원자력 시스템의 연구개발을 선도하고 있고, 향후 최대 원전 시장도 미국에 있다. 따라서 한국 원자력이 농축재처리 도입, 미래 원자력 개발, 원전 수출 등을 통해 도약하려면 미국 행정부, 의회, 산업계, 비확산 전문가들이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원자력·비확산 파트너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한·미 협력 기반 조성을 목표로 이 기금은 국내 비확산·원자력정책 전문가 양성, 비확산·원자력연구센터 설립, 미국 소재 ‘한미 비확산·원자력협력·정보센터’ 설립, 한·미 비확산·원자력 전문가 전략대화 운영 등을 지원한다.
한국 원자력은 ‘농축재처리 있는 원자력’으로 전환과 도약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따라서 정부의 ‘한·미 원자력 협력 태스크포스’에 대한 원자력계의 기대가 크다. 그런데 정부 대표단이 이 원자력 난제를 해결하려면, 제도적 준비가 뒷받침돼야 한다. “나무를 베는 데 여섯 시간이 있다면, 첫 네 시간을 도끼를 가는 데 쓰겠다”는 영어 격언이 있다. 앞서 제시한 3개의 제도 정비가 바로 도끼를 가는 것이다.
전봉근 한국핵정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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