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 8·25 한·미 정상회담의 성공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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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핵 전문가 마이클 맨들바움 교수가 한국의 핵 개발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글을 썼다. 북한의 미국 본토 핵 공격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 제공을 꺼릴 수 있고, 그 경우 한국은 자체 핵 개발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슷한 불안감을 가진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도 한국을 따라 핵 개발을 시도하게 되어, 결국 핵확산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처럼 8월 25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는 세계 안보 질서 향배에도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지난 72년 동안 한·미 동맹은 군사동맹에서 경제동맹, 그리고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확장하며 진화해 왔다. 그러나 한·미 동맹의 중심축은 어디까지나 군사동맹이다. 양국 간 경제협력이나 글로벌 협력은 군사동맹을 통해 한국의 안보가 보장되지 않으면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중요한 군사동맹의 핵심 전제가 트럼프 2기 출범 후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미국 대통령들은 한국의 방어에 대해 강한 의지를 표명해 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이 남침을 한다면,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의해 미국 본토가 공격받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북을 강력하게 응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가 2023년 4월 워싱턴 합의와 8월 한·미·일 3국 간의 캠프데이비드 합의였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 달리 동맹을 거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오랫동안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 왔다. 1기 때는 실제로 미군을 철수하려 했지만, 참모들이 어렵게 말려 실행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북의 미국 본토 타격을 감수하고 한국을 지켜줄 것인지 불안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흔들림 없는 안보 공약을 재확인하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한·미 관세 협상의 구체화도 중요하지만, 2차적인 문제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핵 확장억제의 지속적인 제공이라는 안보 공약만 확실하게 약속해준다면, 전략적 유연성 문제나 주한미군 감축 및 역할 조정 문제도 큰 어려움 없이 적정선에서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러한 확약이 없는 애매한 상태에서 미국 측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국민들의 불안감은 가중될 것이다. 향후 재개될 가능성이 있는 북·미 협상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미국이 한국의 안보 우려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아메리카 퍼스트’의 관점에서 북·미간 합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래적인 외교를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몇몇 소수 국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해왔다. 어떻게 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위 두 나라에 대한 인식 수준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겠지만 다음과 같은 방안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GA)’ 프로젝트 달성의 최대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조선업 협력(MASGA)을 통해 세계 선박 건조량의 0.2%에 불과한 미국의 어려운 상황을 크게 보강해 줄 수 있고, 유사한 협력이 반도체, 방산, 원자력 분야 등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사실 미국을 도울 수 있을 만큼의 제조업 능력을 가진 나라가 한국 이외에는 별로 없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 개인 간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렇기에 양 정상 간의 돈독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안들을 준비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미국 정계에는 새로 등장한 한국 정부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가진 인사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선입견을 확실하게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을 주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에 앞서 일본 방문을 결정한 것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단순히 일본, 미국뿐 아니라 국제사회 전반에 이재명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것이다.
셋째, 미국 측의 국방예산 증액에 대한 요구는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사회 복지, 인공지능(AI) 투자 등 곳곳에 재정 소요가 크다. 그러나 지금 국제정치는 힘이 곧 정의인 세상, 규칙이 사라지고 무력이 앞서는 세상, 그 결과 여기저기서 전쟁이 쉽게 터지는 세상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같은 험한 세상에서 최종적으로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의 군사력뿐이다. 물론 남북 관계 개선으로 국방비 소요를 줄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최근 김여정의 독설에서 드러나듯이 그러한 이상이 단기간 내에 달성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럼에도 지속적인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안보 정책은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야 한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들을 통해 한국이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미국에 꼭 필요한 나라이고 그래서 꼭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심어준다면, 그리고 확장억제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발언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번 정상회담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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