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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 “DJ는 동원 가능한 최대의 인재를 쓰려 했다”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19-08-12 09:49    4,911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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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서거 10주기 맞아 ‘전집’ 출간
진보·보수 평가벽 넘는 계기 되길
진영 독점으론 국가 발전 어려워
화합·통합의 정치 돼야 도약 가능
86세대, 민주화 업적은 인정되나
국가경영까지 자신하는 건 오만

『김대중 전집』 총 30권 완간하는 박명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



오는 18일은 김대중(DJ)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다. 때맞춰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김대중 전집』을 출간한다. 전체 30권이다. 2015년 1차로 10권(대통령 재임~퇴임기)을 출간한 데 이어 이번에 20권(1948년~97년 대통령 당선 이전)을 추가했다. 통상의 회고록·전기와 달리 연설문·국회 발언·인터뷰·일기·메모 등의 사료를 토대로 DJ의 일생을 조명한 점이 두드러진다. 

작업을 주도한 이는 김대중도서관장인 박명림 교수다. 박 교수는 “DJ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육성으로 드러내게 하는 것, 마지막 사실까지 밝힌다는 자세로 정확성을 기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25만여 점의 사료를 수집했고, 판독이 안 되는 것 말고는 한 글자도 고친 게 없다”고 말했다. 연구원·박사·직원 등 25명이 꼬박 3년을 매달린 노작(勞作)이란 설명도 곁들였다. 민간 모금을 재원으로 이뤄진 탓에 300질로 출판을 한정했다. 출판 축하모임이 13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다. 
 


Q : 증언이나 구술이 아니라 사료를 통해 전직 대통령의 삶을 조명한 시도는 처음 아닌가. 
A : “『조선왕조실록』 이후 한 시대와 사회에 영향을 끼친 국가 지도자의 자료가 종합 출간되는 것은 처음이다. 미국·일본 등 외국의 도서관, 국립문서보관소, 대통령 기념관 등에 흩어져 있는 사료를 수집했다. 김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갖고 있던 수첩·메모 등 개인 기록과 민주화 운동을 같이한 측근들, DJ정부 인사들도 자료를 기증해줬다. 역대 정부의 지원으로 자료 수집이 가능했다. 총장 등 연세대의 지원도 결정적이었다. 김성재 전 문화부장관이 전집 출간 후원회장을 맡아줬다. 2004년부터 15년이 걸린 작업이다. DJ 생전에 내고 싶었지만 워낙 자료가 많고 방대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Q : 사료를 통한 의미 있는 발견은 뭔가. 
A : “(DJ의)준비의 철저성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연설문을 하나 쓰더라도 신문 판독, 자료 수집, 전문가 대화 등 최대한 준비된 후, 그래서 스스로 이해되고 설득된 후에 글을 썼다. 정치평론가로 『사상계』에 기고할 때부터 그랬다. 일관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철저한 준비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국정운영을 하려는 분들이 시간을 내서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얼마나 골똘히 사색하고 절제된 말을 사용했는지, 절대 국민을 흥분시키지 않고 외국을 비판하지 않았는지를.”



Q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A : “군사 독재에 의해 공산주의자라고 공격받았는데 자료를 보면 일관되게 반독재 친 대한민국임을 알 수 있다. 미국 망명 시절, 일부 활동가들의 망명정부 수립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자료가 남아있더라. 원문을 입수해 보여주니까 놀라면서 ‘하나님이 무심하시다. 독재 정부한테 시달릴 때 공개되지 않고 박 교수가 왜, 이제 이걸 갖고 왔나’고 한 적이 있다.”



Q : 학문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A : “감히 ‘김대중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DJ의 학문과 지적 수준, 진단과 사유의 깊이에 놀랐다. 고전부터 역사·문명·정치·경제·문학까지 독서의 양과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방대하고 깊다는 것을 전집이 나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에 바탕해 영문 선집을 내고, 브란트·만델라와 DJ를 국제적으로 공동 연구한 영문 저작도 내려고 한다.”



Q : 전집 출간의 정치적 의미는 뭔가. 
A : “정치 지도자에 대해 진보-보수로 나뉘었던 평가의 벽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진보는 김대중·노무현, 보수는 이승만·박정희만 평가하는 걸 넘어, 선진국처럼 그 대통령의 객관적 기여는 뭐고 부족했던 것은 뭔가를 엄정하고 균형 있게 평가하는 데서 대한민국의 선진국 도약은 가능하다고 본다.”



Q : DJ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뭐라고 생각하나. 
A : “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인재를 동원하려고 한 점이다. 제도 정치와 운동 정치, 의회와 재야로 분리돼 있던 것을 국가 경영을 공동으로 하는 형태로 전환시켰다. 민주화 세력을 대거 국정 운영에 참여시킴으로써 전문관료+산업화세력+민주화세력이 균형을 이룬 국정 운영을 해나갔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일 관계에서도 잘될 수 있었다. 북한 참여세력을 제외하고 조봉암 등 거의 모든 세력을 등용한 이승만 정부 초기 이후 가장 넓은 인재 등용이 이뤄졌다.


DJ는 현실주의자였다. 야당이었지만 65년 한·일 협정, 베트남 파병, 7·4공동성명에 찬성했다. 주한미군 철수엔 단호히 반대해 감옥에서 변호사를 통해 카터 정부에 ‘주한미군 철수는 안 된다’는 의사를 전달한 기록이 있다. 

또 민간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유지하려 했다. 국가 발전에서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정치가 다 하려고 해선 안 된다. 정치는 방향과 토대를 제시하고 나머지는 민간 자율에 맡겨야 한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DJ·노무현 정부까지는 시민사회의 성장,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고 유지하려 했지만 이후 한국 사회가 후퇴하고 있다. 모든 걸 정부가 다 하려 한다. 진영만 바뀌면 문화·언론·학술·시민·과학·정보 영역까지 진영논리가 디스켓을 갈아 끼우고 있다. 민간의 자율과 창의를 죽이고 위축시키는 걸 반성해야 한다.” 
 


Q : 왜 이렇게 됐을까. 
A : “애국심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진보는 보수의 국가 건설과 경제 발전을 인정하고, 보수도 진보의 애국심을 인정해야 한다. YS는 보수세력과, DJ는 JP(김종필 전 총리) 산업화 세력과 연합정부를 만들었다. 안보·국제·평화 문제는 진영이 없다는 걸 인정한 거다. DJ는 이승만 때의 한·미관계, 박정희 때 한·일 관계, 노태우 때 한·중 관계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1동맹 3우호’ 체제를 이어갔다. 강인덕(통일)·박정수(외교) 장관·이종찬(국정원장)·이홍구(주미대사)·이수성(평통 수석부의장)씨 등 외교·안보 쪽은 전원 보수 인사를 썼다. 그때가 한국 외교의 절정기였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65년 협정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조각 땐 통일부장관에 박근혜 의원을 시키려 했고 임기 후반엔 대연정까지 하려 하지 않았나. 그러나 이후 정부의 리더들은 국가 역량을 결집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진영논리를 넘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리더십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Q : 정치학자로서 얻은 소득이 있다면. 
A : “나라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사료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왔는지를 깨닫게 됐다. 한 나라가 식민지로부터 세계 10위 국가로 발돋움해 초고속 발전한 데는 특정 진영, 특정 정당, 특정 이념, 특정 지도자 혼자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건 종합예술이다. 우리 사회가 갈등을 넘고 상호 인정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이 서로 용서·화합·인정·연합하는 것, 그것만 해줄 수 있다면 여기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Q : 도약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이 뭐라고 보나. 
A : “나도 86세대지만, 86세대가 겸허해져야 한다. 사회가 이렇게 분열되고 외교 문제까지 수습 불능상태로 들어가면 국가 발전은 상당히 어렵다. 60, 70년대 세대는 평생 민주화운동 했지만 86세대는 20대 때 짧게 운동하고 바로 민주화가 됐다. 그런데 중앙 정치와 국정에는 젊을 때부터 너무 오래 참여하고 있다. 이게 2030의 불만이기도 하다. 86세대는 정치적 탄압과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2030의 실업·비정규직·결혼·출산 공포 같은 실존적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민주화 업적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국가 경영까지 자신하는 건 오만이다. DJ·YS 같은, 한때가 아니고 생애를 걸고 민주화운동 한 분들도 국정 운영에선 절반을 상대방과 같이했다. 86세대는 이분들보다 국정 경험, 민주화운동 경력, 의회민주주의 경력이 훨씬 짧은데 국정 운영의 지혜는 고사하고 정책 지식도 부족한데 독점적 진영논리로 가서는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평생 민주화운동을 한 DJ도 산업화 세력과 함께 통합 정부를 운영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Q : 아쉽게 생각하는 DJ의 실책과 한계는 무엇인가. 
A : “개인의 유산은 짧지만 제도의 유산은 오래간다. 퇴임 이후엔 제도를 통했을 때 유산이 더 잘 지속한다. 국민 통합을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했듯이 JP와의 권력 분립이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적극 대면하지 못한 부분이 가장 안타깝다. 3당 합당을 통해 보수에 합류한 YS는 내각제 실현이 어려웠다고 할 수 있지만, DJP 연합 정권을 가능하게 한 고리가 개헌 합의였기 때문에 좀 더 진지하게 대응했었어야 했다. 자신의 정치적 탁월함과 리더십에 대한 과신이 있었던 것 같다.”



Q : 생전 DJ가 남긴 당부 말이 있나. 
A : “개헌을 못 한 데 대해, 당시 외환위기 극복이 화급했고 국민들 뜻이 내각제에 있지 않은데 밀어붙이는 데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퇴임 후 진영 정치가 악화되는 걸 보더니 말년엔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 5년 단임제가 정책의 연속이 어렵고 권력 독점과 생사 투쟁의 갈등이 너무 심하다며 개헌에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인터뷰가 이뤄진 건 2일.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백색국가(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 배제 조치에 한국 정부가 경제 전면전을 선포한 날이다. 옅은 미소를 띤 DJ상을 뒤로하고 나선 거리에 내리쬐는 한여름 땡볕에 숨이 턱 막혔다.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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