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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탈북민의 남한 적응, 왜 어려운가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4-09-11 16:37    78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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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영국에서 유학할 때, 입학 동기 중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사람은 필자 외 일본과 중국 학생 한 명씩, 셋뿐이었다. 학기가 끝나면 우리끼리 생존(?) 축하 모임을 열곤 했지만 어쨌든 잘 버텨 모두 원하던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국 대학에서 중도 탈락을 가장 많이 한 학생은 같은 언어권인 미국인이었다. 학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미국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문화 충격’이라고 했다. 그때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영국에서 한참 살다 미국을 처음 방문하고서는 두 나라의 문화 코드가 정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국에서는 상품을 진열한 가게에 손님이 들어오면 자유롭게 둘러보도록 놔두는데, 미국에서는 직원이 ‘무엇을 도와줄까요’라며 다가왔다. “물건 살 마음이 없으면 빨리 나가세요”라는 압박처럼 느껴졌다. 


사회주의 체제는 문화도 바꾼다. 동유럽을 연구한 학자들(말리소스카이트·클라인, 2018)은 사회주의와 음주 문화의 관련성을 밝혔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산 기간이 길수록 술을 더 자주 마시고 폭음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가치관이 형성되는 18∼25세에 사회주의 국가에 거주했던 남자는 중년과 노년에도 폭음하는 습관이 있다. 음주가 억압적 환경으로부터의 탈출구였고, 이를 대체할 다른 오락 프로그램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 아니다. 사회주의는 인적자본의 축적을 저해한다. 독일 통일 당시 서독과 동독 주민의 지능지수(IQ)를 연구한 논문에 따르면, 서독 출신 징집병의 IQ는 101인데 비해 동독 출신 징집병은 95로 꽤 큰 차이가 났다. 그러나 통일 후 동독 출신 징집병의 IQ는 해마다 0.5씩 증가했다. 


탈북민의 남한 정착은 어렵다. 남북하나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탈북민의 실업률은 4.5∼9.4%로서 남한의 2.7∼4.0%보다 크게 높았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의무·우대 채용과 고용 보조금 지급 등이 없었다면 실업률은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소득의 차이도 크다. 서울대 경제학부 연구팀의 2016년 조사에 의하면, 월 가구소득이 200만원 이하인 남한 출신 주민은 전체 표본의 5%에 불과했지만, 탈북민은 70%에 달했다. “남한에 얼마나 적응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보통” 혹은 “어느 정도”라고 응답한 비중은 74%였고, “완전히”라고 응답한 경우는 18%에 그쳤다. 그것도 정착 후 10년 이상 지나면 주관적인 적응도는 오히려 하락한다.

왜 이렇게 탈북민의 남한사회 정착이 힘들까. 북한의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 제도가 낳은 문화가 주민의 마음에 내재화된 것이 중요한 이유다. 필자를 포함해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심의 연구진은 탈북민의 남한 적응에 있어 문화 혹은 가치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최근 게재했다. 먼저 탈북민의 가치관을 측정하기 위해 암묵적 연상 검사(Implicit Association Test)를 시행했다. 예를 들어, 참여자에게 북한 국기를 보여주고 이를 ‘좋음’이란 단어와 연결할 때의 속도와 ‘나쁨’과 관련시킬 때의 속도를 비교했다. 만약 전자가 후자보다 빠를 경우, 이는 북한에 대한 무의식적 친밀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또 판매자 혹은 구매자의 역할을 임의로 부여한 후 모의 경매를 시행해 거기서 남긴 이윤이나 잉여를 경제성과로 간주했다. 그 결과, 무의식적으로라도 북한에 친밀함을 느끼는 탈북민일수록 경제적 성취도가 낮음을 발견했다. 이는 사회주의 제도가 성취동기를 약화하고 사고와 행동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으로 풀이되었다. 


분단 후 70여 년이 흐른 지금 남한과 북한 주민의 문화 코드는 크게 달라졌다. 한 탈북민은 하나원 교육을 마친 날 집에 혼자 남게 됐을 때 한없이 막막했다고 한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정권이 지시하는 대로 했을 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정착 교육과 관련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이를 활용할 엄두가 나지 않고 그 방법을 모르기 일쑤다. 신뢰할 수 있는 지인이 있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겠지만 어려울 때 부탁할 수 있는 남한 출신 주민은 평균 한 명이 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언어가 달라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온 외국인이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 쉽다.

탈북민은 머리에 불을 이고 산다. 가슴에 물을 담고 산다. 자유 없이, 어렵게 산 간고(艱苦)의 세월이 억울하고, 두고 온 가족과 산천이 가슴에 사무친다. 억압적인 제도의 피해자인 이들의 남한 정착은 또 하나의 ‘고난의 행군’이다. 탈북민의 신속하고 성공적인 자립이 진정한 통일 준비다. 그래야 북한 주민도 통일을 염원하고 남한도 통일비용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통일 독트린의 얽힌 난제를 풀 열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정부의 정착지원 정책은 엄밀한 증거에 기반을 두지 못했다. 이제라도 탈북민의 자립 방정식을 찾는 데 정부와 학계의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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