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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 제주 : 세계사의 대표 법정에서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4-11-01 17:07    85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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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한 선현은 과거에는 우리가 죄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면 오늘날에는 법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잠언을 남긴 바 있다.

전자는 인간들이 가진 원죄(에 대한 구원행위)를 넘어 죄를 팔아 권세를 누리고 치부를 하는 종교인들의 행태에 대한 고발을 포함한다. 후자도 같다. 법은 질서를 지키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기능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으나, 법이 난무하며 법률가가 득세하고 그들끼리 싸울수록 세상은 법이 없는 시대 못지않은 질곡에 빠지고 만다. 종교도 법도, 이념도 권력도 모두 공동체의 일부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고 최종적인 준거로 간주할 때 삶과 사회는 거기에 갇히고 만다.


인간사에서 법에 관한 한 제주 4·3사건 직권재심은 정반대의 두 본질을 모두 보여준다. 즉 4·3 당시 일반재판과 군사재판을 통해 ‘유죄’로 판결받은 피해자들은 ‘무죄’다. 10월 29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오전(일반재판)과 오후(군사재판) 내내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직권재심을 참관하는 동안, 4·3과 4·3 이후 사망, 행방불명, 고문, 폭행, 누명, 장애, 연좌제, 삶의 간난신고의 증언을 듣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견딜 수가 없었던 억울함으로 증언 도중 눈물을 흘리는 유족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고, 법정은 죄와 벌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세상의 무법상태와 인간들의 무죄 때문에 숙연해졌다.

인도에 반하는 범죄, 또는 국가폭력과 극복과정을 공부하려고 해외의 국제법정 재판을 직접 참관하기도 하고, 관련 기록을 보기도 하고, 현장 답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주처럼 유죄가 아닌 무죄 청구를 위해 국가가 사건 자체에 대한 특별 독립 기구를 설치하고, 개별신청을 넘어 사건 전체에 대해, 일반재판과 군사재판을 막론하고 과거-현재-미래, 그리고 가해자(국가)-피해자(희생자/유족), 판사-검사-변호사 사이의 ‘무죄 합의’를 통해 온전한 시민성과 전체성의 복원에 성공한 사례는 아직 보지 못했다. 과거 극복의 새 세계경로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국가공권력의 부당한 행사(과거), 피해자 명예회복과 유족 위로(현재), 비극과 피해의 재발 방지(미래)가 준엄하게 언명되었고, 검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한목소리로 무죄를 요청하고 변론하고 선고하는, 세계사에 매우 희귀한 사법 사례였다. 이 만장일치는 과거 국가의 가해행위와 유죄판결이 명백히 초법·불법·무법 상태였음을 증거한다. 합법과 불법의 주체가 뒤집히는 것이다.


유족과 시민의 요구, 의회의 입법행위(4·3특별법 개정)에 이은 판사-검사-변호사의 의견일치는 법의 본질과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은 함의를 갖는다. 규율·규칙으로서 실정법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약속·합의로서의 인륜법과 사회규범의 복원을 말한다. 즉 법 이전에 정치, 정치 이전에 인륜과 인간을 말한다.

법치의 시대에조차 선현들은 실정법·관습법·자연법·신법·영원법 사이의 위계를 알고 있었다. 인간존중, 대화, 민주주의, 사회규범은 이토록 법보다 훨씬 중요하다. 현장에서 확인하는 4·3의 극복과정, 그리고 법정 201호는, 이념과 폭력에 의해 박탈당했던 인륜성을 복원해가는 압축 소우주였다. 폭력에 전율했던 우리는 감동으로 전율한다.


세계로부터의 상찬도 우리에게 감동을 가득 선물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주요 작품은 인간의 연약함과 어둠, 비애와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역시 이 점을 콕 짚고 있다. 이를테면 학살, 죽은 자로 인한 안티고네적 상황은 곧 산 자의 고통을 말하며, 따라서 둘은 항상 중첩된다. 씻김과 애도, 기도와 위로, 탄원과 변론의 행위와 절차가 필연인 까닭이다. 한강 문학의 도저한 보편적 지향이자 도달로 보이는 지점이다.

공교롭게도 유럽에서 제주 4·3을 논의하기 위해 도착하기 전날 노벨문학상이 발표되었다. 4·3 극복의 감연한 과정은 언젠가는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는 언명에 비추어, 참으로 감사하고 청명한 느낌이었다. 이 노벨상 수상 작가의 대표 작품의 한 주제는 건국과 민주화 과정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과 광주 5·18이었다. 타인들의 고통에 대한 한 작가의 각고의 연대와 공감과 노고로 인한 세계의 상찬을 통해 당시 고통받은 제주민과 광주시민은 물론, 작품도 수상도 우리 모두의 지난날에 대한 공통의 위로로 다가온 이유였다.

한강 작가의 문학 작품도, 직권재심이라는 법적 절차도 모두 과거의 인간 고통에 대한 현재의 인간적 성찰이자 응답이다. 온통 법과 법률가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과거의 무법상태와 인간 고통에 대한 연민과 치유를 통해, 또 법과 법률가 본래의 역할 회복을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해준 한강 작가와 4·3 직권재심의 판사·검사·변호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세계의 상찬과 제주의 법정이 내준 목소리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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