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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고려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글로벌 사우스 접근법: 외교의 삼분지계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6-05-06 13:31    21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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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프린스턴대 존 아이켄베리 교수가 제시한 ‘세 개의 세계’라는 시각은 유용하다. 전통적 서방 국가들인 ‘글로벌 웨스트(Global West)’, 중국·러시아·이란·북한으로 이어지는 신(新)동구권인 ‘글로벌 이스트(Global East)’,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려는 제3세계 개도국 중심의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가 국제 관계를 형성한다. 이미 서방의 세계에 진입한 한국이 외교 전략을 짜는 데 있어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는 이분법적 선택이 아니라, “이 세 공간을 어떻게 동시에 다룰 것인가”라는 복합적인 배치술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 중에서도 글로벌 사우스의 무게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들은 이제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갖추었거나, 에너지와 자원, 인구와 시장을 무기로 국제정치에서 실질적인 협상력을 행사한다. 에너지 흐름부터 러시아 제재, 공급망 재편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선택 없이는 어떤 국제적 합의도 만들어지기 어렵다. 강대국이 방향을 정하면 세계가 따라오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글로벌 사우스는 구름과 같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형태가 흐려지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처럼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엉킨 공간이다. 지리적 경계라기보다 정치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이 개념을 실체로 오해하는 순간, 한국 외교는 출발점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들의 부상을 막연한 기대와 동일시하는 것도 위험하다. 글로벌 사우스는 각국의 철저한 실리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이들을 하나의 진영으로 상정하거나, 당위적인 연대만으로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전략은 흐트러진다. BRICS 내부만 봐도 인도와 중국은 경쟁하고, 중동 국가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글로벌 사우스는 각자가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 모여 있는 거대한 협상의 장에 가깝다.

우리는 이미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이를 경험했다. 지난 엑스포 유치 과정은 글로벌 사우스의 참모습을 확인한 뼈아픈 사례다. 우리는 전례 없는 광범위한 접촉을 통해 협력과 연대를 호소했으나, 그들의 선택은 냉정하게 이해관계를 따랐다. 상황이 바뀌면 입장도 바꾸는 것은 그들에게 변덕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그리고 그때 구축한 네트워크를 어떻게 실질적인 자산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외교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축적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외교에는 상대에 따라 다른 옷을 입는 세밀한 ‘배치술’이 필요하다. 첫째, 글로벌 웨스트에는 ‘신뢰의 외교’가 기본이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전제다. 한·미 동맹과 유럽, 일본과의 협력은 단기적 이익을 넘어선 장기적 뿌리다. 국제정치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신뢰라는 자산은 더욱 귀해진다. 이 견고한 신뢰가 바탕이 될 때 비로소 다른 세계와의 협상력도 생겨난다.

둘째, 글로벌 이스트에는 ‘보이지 않는 외교’가 요구된다. 중국, 러시아, 이란 등은 관계가 불편해도 외면할 수 없는 관리의 대상이다. 하지만 깃발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보다, 수면 아래서 실질적인 리스크를 관리하고 실리를 챙기는 ‘스텔스(stealth)’ 같은 기민함이 필요하다. 국제 제재와 분쟁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드러난 접근은 불필요한 오해를 부르고 동맹의 신뢰를 흔들 수 있다.

셋째, 글로벌 사우스에는 ‘보이는 외교’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상대가 한국을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로 인식하게 만드는 가시성을 의미한다. 모든 나라에 힘을 분산하는 백화점식 외교를 지양하고 인도, 사우디, 인도네시아 같은 전략적 거점 국가를 중심으로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올해는 ASEAN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에도 관심을 증폭시킬 시점이다. 넓게 퍼지는 외교보다 깊게 연결되는 집중력이 핵심이다.

일각에서는 “우리도 글로벌 사우스처럼 이쪽저쪽을 오가며 이익만 챙기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공급망에 깊이 연결된 수출 국가이자 안보 리스크를 안고 있는 한국에게 그런 유연성은 자칫 ‘신뢰의 붕괴’라는 치명적 대가로 돌아올 수 있다. 결국 핵심은 ‘순서’와 ‘균형’이다. 글로벌 웨스트와의 신뢰를 기반으로 삼고, 글로벌 사우스에서 가시성을 확보하며, 글로벌 이스트를 조용히 관리해야 한다. 이 순서가 뒤집히거나 섞이는 순간 외교는 방향을 잃는다. 신뢰라는 확실한 자산을 불확실한 기대와 교환하는 것은 최악의 수다. 신뢰, 가시성, 은폐성이라는 세 가지 카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세 개의 세계를 동시에 다루는 현실적인 외교의 출발점이다.

이재승 고려대학교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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