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 시대가 바뀌면 외교 전략도 바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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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한때 성공했던 전략도 국제 정세가 바뀌면 먹히지 않고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다. 그래서 변화의 흐름을 예민하게 읽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필자가 외교통상부 장관을 맡았던 것이 23년 전이다. 당시 국내 정치적 이념보다 국익을 앞세운 실용주의 외교를 하겠다고 힘을 다했다. 그러나 이른바 자주파·동맹파 싸움의 와중에 사직했다. 씁쓸한 옛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금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 때문이다.
먼저 한·미 관계를 보자. 당시 미국은 소련 붕괴 후 유일 초강대국으로 자신감이 넘쳤다. 아직 중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15% 정도였다. 중국은 ‘도광양회’를 내세우며 미국과 협조했다. 이때 한국은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안미경중’ 전략을 추구했다. 당시에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필자 사임 후에는 ‘동북아 균형자론’이 등장해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취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는 전환점이었다. 미국의 취약한 모습을 본 중국은 자신감을 키웠고, 시진핑 집권 후에는 ‘분발유위(奮發有爲)’를 내세우며 미국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오바마 행정부까지는 대중국 포용정책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 1기 때인 2018년 관세전쟁을 계기로 포용정책을 사실상 폐기했다. 바이든 정부도 대결 정책을 이어받았고 트럼프 2기에는 대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이제 군사·경제·기술·외교 모든 분야에서 미·중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과거처럼 안미경중이나 균형 외교를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지난해 이재명 대통령 당선 직후 백악관 관계자는 선거 결과에 관한 논평에서 뜬금없이 중국의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간섭과 영향력 행사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한국 외교가 힘들어지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이 대통령이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설에서 안미경중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해 안도했다. 새 상황에 맞는 새 전략 방향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여러 조치를 보면 한국에 대한 전략적 신뢰에 균열이 생긴 것 아닌가 우려된다. 원인이 한국의 대중국 정책이든, 대북정책이든, 트럼프 행정부의 거래적 동맹관이든 냉정하게 짚어보고 변화된 새로운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숙고해봐야 한다.
그렇다고 중국과 적대관계로 갈 필요는 없다. 중국은 중요한 이웃이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이 미국을 떠나 자신의 영향권으로 들어오길 바란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칙을 갖고 우호 관계를 도모하면서 중국 지도자들에게 솔직히 말할 필요가 있다. “당신들이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핵도 없는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위협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한·미동맹이 우선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상호 존중과 호혜의 정신 아래 잘 지내자.” 원칙이 없이 미·중 사이 어디쯤 애매하게 서 있겠다면 양쪽 모두에 불신을 주고 고립될 수 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2000년대 초반이나 2018~19년과 다르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는 대북 제재에 동참했다. 북한은 제재 해제가 절실했고 남북대화와 비핵화 협상에도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미·중, 미·러 대결이 깊어지고 중·러의 협력으로 대북 제재의 실효성이 크게 약화됐다. 북한은 러시아에 파병하고 동맹을 맺어 경제적·군사적 이익까지 얻었다. 이제 남측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적대적 두국가론’을 앞세우며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 북한에 과거의 대북 전략을 고수하면 비용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적대정책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소통 채널은 열고 남북대화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대화 자체를 성과로 삼거나 그것을 위해 우리의 정체성과 원칙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대화는 지지하되, 한국의 안보를 희생하는 미·북 간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한·미 간 전략적 공감대를 다져야 한다.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지난 23년간 우리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이 놀랍게 커졌다는 점이다. 조선·반도체·방산·원전 등 제조업 능력이 외교의 핵심 카드가 됐다. 특히 중요한 것은 거래적 외교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지키는 것이 미국에도 이득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늘어난 국력을 외교적 영향력으로 바꾸는 현명한 전략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 안보 부처와 경제·산업 부처가, 그리고 아직 그런 구분이 남아 있다면 자주파와 동맹파가 철저하게 한 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본·유럽·호주·인도 등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원하는 뜻이 맞는 민주 국가들과도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진정한 자주는 동맹과 거리를 두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국력을 키우고 동맹을 국익에 맞게 활용하며 강대국들이 한국을 ‘대체불가’한 파트너로 인식하고 필요로 하게 만드는 데서 나온다. 원자력협정 개정과 핵추진잠수함 사업도 그런 전략적 외교를 통해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2020년대의 험난한 권력정치 시대에 필요한 실용주의 외교이고 진정한 자주일 것이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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