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CSIS 포럼 2025 개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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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일보-CSIS 포럼 2025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고, 이재명 대통령이 CSIS를 방문해 연설하고 조금 전까지 만찬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존 햄리 소장과 빅터 차 수석 부소장은 서울에 오지 못하고 화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두 분과 여기 오신 제임스 매티스 전 미국 국방부 장관, 필립 골드버그 전 주한 미국 대사, 시드니 사일러 전 미국 국무부 북핵 6자회담 특사에게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측의 정동영 통일부 장관, 윤영관·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김성한 전 대통령 안보실장,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 등 한국측 전문가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때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했습니다. 2기 들어서는 아예 미국만을 위한 세계질서를 만들려고 합니다. ‘America First’에서 ‘America Only’로 바뀐 것입니다. 미국이 이용당하고 갈취당해왔다면서 국제질서와 규범을 무시합니다.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에 협력하지 않으면 곧 적”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는 “힘이 정의”라고 합니다. 당장에 이익이 안되면 국제적 관여를 피하고 있습니다. 지구적 차원의 재난에 맞서는 세계보건기구(WHO)와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취임 첫 날 탈퇴했습니다. 자유주의 국제무역 질서를 수호하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도 무력화시켰습니다.
미국이 무차별적이고 전방위적인 관세부과에 나서자 권위주의 국가인 중국이 “우리가 자유무역주의 세계질서의 수호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72년간 안보·경제·글로벌 동맹을 맺어온 한국에게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미국은 과거 로마제국이 압도적 힘을 가졌지만 자만(hubris)을 내려놓고 ‘제국적 절제(Imperial Understatement)’로 장기간 영향력을 유지했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는 미·중 패권경쟁의 최대 격전장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광활한 태평양에는 중국과 미국 두 대국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중국은 해군력을 키워 미국의 안방이나 다름없던 서태평양에서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서태평양에서 밀려나면 한국과 일본은 중국 해군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해역에 둘러싸인 섬이 될 것입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도광양회라는 슬로건 아래 경제성장을 중시하면서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순응해왔습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흔들린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세적 외교로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세계의 유수 대기업들이 중국을 빠져나가고 중국 경제는 활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불안해진 주변국들은 미국을 아시아 태평양으로 더 끌어들이고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중국은 19세기 말 독일 빌헬름 2세의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다. 젊은 황제는 독일의 번영과 유럽대륙의 평화를 달성했던 비스마르크 총리를 해임하고 힘을 과시하는 공세 외교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이후 영국·러시아·프랑스 등 주변국은 독일을 두려워해서 뭉쳤고, 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에 맞서 싸웠습니다. 중국에게 유사한 상황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높지만 안보 차원의 신뢰는 낮습니다. 중국은 미국이 자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고 불만이고, 미국은 중국이 현상 변경을 시도한다고 불안해 합니다.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두 나라가 대타협을 모색해야 할 시기입니다.
미국은 경제력이 강해진 중국을 동등한 파트너로 간주하고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 경제기구에서부터 중국의 지분과 발언권을 높여줘야 합니다. 미국은 다자 군사안보 질서의 영역에도 중국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중국을 아예 나토 회원국으로 참여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19세기의 패권국 영국이 떠오르는 미국을 기존 국제체제에 대한 도전자가 아니라 협조적인 참여자로 만들기 위해 배려했던 역사를 떠올려야 합니다.
미국이 기존 미국 중심의 양자 동맹 네트워크와 별개로 유럽의 나토처럼 동북아에서 다자 안보협력 기구를 창설하는 것도 신뢰구축의 한 방법입니다. 미국은 한국·일본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을 협력적 안보질서의 틀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중국도 한·일 등 주변국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미국과 군사안보 차원의 신뢰를 쌓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중 갈등을 방치하면 두 나라 모두 안보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양국은 미국과의 동맹에 충실하면서도 동아시아에서 미‧중 갈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으고 역내 평화를 창출해야 할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중재 중인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만나 북핵 문제 해결의 물꼬를 트려고 합니다. 수교를 염두에 두고 워싱턴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열 가능성도 있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을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소망스러운 장면일 것입니다.
북·미 수교는 한반도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신의 한 수입니다. 1990년 한·소 수교, 1992년 한·중 수교를 전후해서 북한이 미국, 일본과 수교했다면 핵 개발에 올인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1992년 1월 북한의 김용순 국제부장은 뉴욕으로 날아가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차관과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북한은 후속 회담의 재개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절했습니다. 한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한 차례만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북·미 북·일 수교는 이뤄지지 않았고, 북한은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습니다. 극도의 체제 위기감 속에서 핵 개발과 선군정치로 달려갔습니다. 냉전 해체 이후의 동구권 다른 나라들처럼 북한이 개혁·개방을 통해 정상국가로 나아갈 전환의 기회를 날려버린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대북정책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북한 핵이라는 군사적 측면에만 집중해 온 과거의 접근법은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북한의 경제 개발과 체제 보장, 미국 일본과의 수교 문제도 함께 다뤄야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미국의 전문가가 함께 만든 현실적 경제발전 로드맵을 손에 쥐고 김정은 위원장과 마주 앉아 이런 포괄적 대타협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방안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북미·북일 수교가 이뤄지고, 전세계의 기술과 자본이 들어가고, 북한과 세계의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북한도 국제적 행동기준과 규범을 지킬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 지도부는 핵이 무용지물임을 서서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한국이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지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이고, 세계 유일의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습니다. 북한은 핵으로 무장했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지구촌의 잠재적 화약고입니다. 더 늦기 전에 북한을 정상국가로 변화시키려면 우리 모두 “핵이 아닌 경제”라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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