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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고려대 교수] 에비앙의 초대장, G7의 진짜 화두를 챙겨야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6-04-08 09:56    31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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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방한 때 6월 에비앙 G7 정상회의 초청장을 남겼다. 글로벌 거버넌스의 정점에 초대받은 것은 분명 ‘인싸(인사이더)’ 인증이다. 하지만 국제정치에서 초대장은 호의로만 오지 않는다. 중동과 우크라이나 전쟁, 호르무즈해협의 불안까지, 이번 G7은 선진국 정례 모임을 넘어선 ‘지정학적 방역’을 위한 위기관리 소모임에 가깝다. G7만으로는 감당 안 되는 공급망과 에너지 안보를 논하며 한국을 부른 이유는 명확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선진국이라는 강남 고급 주택단지에서 한국은 이제 막 전세를 들어온 가구와 같다. 번듯한 외제차(반도체, K-방산)를 굴리고 문화적 존재감도 있다. 외형상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대대로 아파트를 서너 채씩 끼고 임대료를 받아온 일본이나 유럽 노신사들 눈엔 여전히 ‘패기 넘치는 신참 세입자’다. 국제정치의 ‘부(富)’는 노동소득(GDP)만이 아니라 축적된 관계와 신뢰라는 지정학적 자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이 “모두가 원하는 필수 파트너”라고 믿고 싶지만 현장은 냉혹하다. 지난 달 일본에서 만난 한 지인은 이란 전쟁 이후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찻잔을 만지며 대답했다. “한국이 있으면 좋지요. 그런데 꼭 필요한 건 아닙니다.”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국가는 호의가 아니라 필요로 움직인다. 바로 다음 날 일본과 프랑스가 중심이 된 6개국의 호르무즈 해양안보 선언이 발표되었다. 물밑에서 이들 국가들은 이미 공동 문안의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걸 수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맥락을 공유하는 ‘깐부’인지가 위기 상황에선 그대로 실력이 된다.

국제정세의 급변 속에서 여러 대사 직이 공석이었던 외교적 공백은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실제로 마크롱 대통령은 한국보다 일본에 두 배나 긴 시간을 할애하고 돌아갔다. 체급은 커졌으나 관계의 밀도는 아직 미완성인 ‘강남 전세’의 비애다. 신축 아파트에 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그 동네 아줌마들의 찻잔 속 전략회의에 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번 에비앙 G7의 숙제가 생긴다. 이번 회의의 진짜 메뉴판은 ‘경제 불균형’이 아니라 ‘지정학적 위기관리’다. 에너지 공급망, 금융 충격, 그리고 미국과 유럽 사이의 미묘한 시각차까지 얽혀 있다. 이 판에서는 ‘우리 동네 (한반도) 사정’도 봐달라고 호소하는 관성을 버리고, G7의 급소인 안보·에너지 공급망에서 한국만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제안해야 한다. 여전히 같은 레퍼토리만 반복한다면 자칫 병풍 노릇만 하게 된다.

우리가 내밀 수 있는 유용한 카드들이 있다. 서방 진영의 안보 공백을 메울 방산 유지보수(MRO) 네트워크나, 탈탄소와 에너지 안보를 동시에 해결할 원전·수소 공급망 같은 실무적 역량이다. 향후 중동에서 진행될 에너지 및 인프라 재건에 뛰어난 기술력을 발휘할 준비도 되어 있다.

다자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났느냐보다 무슨 메시지를 던졌느냐다. 1~2분짜리 약식 회담(Pull-aside) 사진에 목숨 거는 ‘인증샷 외교’는 이제 졸업해야 한다. 우리가 빠지면 아쉬워할 전략적 기여 방안을 제시할 때 비로소 한국의 자리는 달라진다. 이는 곧 내년 한국이 개최할 G20의 성패와도 직결된다. 한때 G7을 넘어서는 대표성을 가진 무대로 기대를 모았다가 지정학적 갈등의 축소판이 되어버린 G20를 살리는 것은 멋진 의전만으론 부족하다. 개최국은 갈등의 틈새에서 실행 가능한 의제를 만드는 ‘화두’를 던져야 한다. 그러려면 이번 G7부터 이어지는 다자무대의 문법을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

흔히 한국은 스스로를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가교’라 부른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한국은 이미 서방의 일원이다. 몇 해 전 독일 아데나워 재단 글로벌전략회의에서 한 참석자가 “한국은 이미 서방입니다.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인도네시아와 브라질, 사우디 대표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을 기억한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편이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중심에 가까운 파트너인가 아니면 때때로 초청받는 손님인가 하는 점이다. 한국이 G7과 동맹 팀의 일원으로 목소리를 낼 때, 역설적으로 베이징과 모스크바가 우리에게 제시할 협상 카드의 가치도 올라간다. 확실한 축을 가질수록 협상력은 강해지는 법이다.

이제 한국이 고민해야 할 것은 G7이나 G10같은 등수가 아니다. “세입자인 줄만 알았더니, 동네 전체가 필요로 하는 핵심 전문가더라”는 인식을 만드는 것이 승부처다. 에비앙은 최고의 물맛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 물줄기를 어디로 틀 것인지 결정하는 ‘주인의 언어’를 확보하는 일이다. 찻잔 속 대화에 낄 수 있는 진짜 화두를 챙겨가야 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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